김기석목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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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칼람] 누군가의 품이 되어준다는 것설교모음 2022. 3. 24. 11:12
누군가의 품이 되어준다는 것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이름이 발화되는 순간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의 마음에는 다양한 이미지와 상념들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저절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되고 마음이 시원해지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오싹한 불쾌감을 자아내는 이름도 있다. 어떤 이름도 텅 빈 기표가 아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대상과 인격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교도소나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호명되는 까닭은 그 얽힘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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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칼럼] 심연을 마주보며설교모음 2022. 3. 16. 13:14
심연을 마주보며 -콜린 윌슨, 꽃들이 왈클왈큰 피어나는 4월의 하늘 아래서 나는 외로웠습니다. 예수라는 분에게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선지 동산이라 일컬어지는 신학교는 내게 낯선 곳이었습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알고 있는 정답을 나 홀로 모르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심했습니다. 느낌표들이 모인 자리에 홀로 물음표로 선 것 같은 아뜩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좁기는 하지만 캠퍼스에 넘치는 짐벙진 기운이 나와는 무관한 것 같았습니다. 허릅숭이의 어투로 벗들의 마음에 상채기를 내기도 했습니다. 진리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채플을 빼먹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학교 앞 서점에 들렀습니다. 서가에 꽂힌 책을 일람하다가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이끌리듯 책 한 권을 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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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칼럼] 진실한 생명의 세계설교모음 2022. 3. 14. 20:39
진실한 생명의 세계 경칩 무렵부터 시작된 산불이 백두대간을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온갖 생명의 피울음과 한숨 뿐이다. 절망과 고통의 먹구름은 푸른 하늘을 가린 연기와 재보다 한결 더 짙다. 타버린 집과 조상의 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짐승들의 죽음, 그리고 결삭은 땅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록빛 새싹을 밀어 올리려던 찰라 화마에 삼켜켜 재가 된 식물들의 신음소리가 아프게 다가온다. 메숲지던 숲이 어찌하여 이렇게 황량하게 변하고 말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서 또 다른 숲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안다. 생명은 그처럼 장엄하다. 절망의 수렁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한 이들이 내미는 손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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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칼럼] 숫자의 미혹에서 벗어나기설교모음 2022. 2. 14. 07:01
숫자의 미혹에서 벗어나기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시인 고진하의 시 제목이다. 시의 내용을 살필 겨를도 없이 제목이 상기시키는 기억의 편린들이 우련하게 떠올랐다. 아라비아 숫자는 일종의 기호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 숫자 때문에 희망을 품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행여 누가 볼세라 몰래 열어보던 성적표에 적힌 시험 점수와 석차가 떠오른다. 중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교실 뒤에 일흔 두 개의 못을 박고 그 달의 성적순으로 이름표를 걸어두었다. 자리가 뒤로 밀릴 때마다 아이들은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지금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 폭력적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비아 숫자는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계층화한다. 성인이 되었다고 하여 아라비아 숫자로부터 해방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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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칼럼] 궁핍한 시대의 신앙설교모음 2022. 2. 8. 13:42
궁핍한 시대의 신앙 13세기의 수도자 프란체스코는 위험에 처해 있는 교회를 구하라는 다미아노 성인의 꿈 속 메시지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네 명의 탁발 수도사와 함께 포르티운쿨라에 거처를 정하고 아시시의 거리와 근처 마을을 다니면서 사랑에 대해 설교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에서 어느 날 아침 프란체스코가 바친 기도를 소개하고 있다. “주님, 만일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저를 천국에 보내 달라고 하기 위한 것이라면 칼을 든 천사를 보내 천국의 문을 닫아 버리게 하소서. 주님, 만일 제가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저를 영원한 불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으십시오. 그렇지만 제가 당신을 위해서, 당신만을 위해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팔을 활짝 벌려 저를 받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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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칼럼] 갈릴리에 머문 사람설교모음 2022. 1. 29. 10:54
갈릴리에 머문 사람 -서덕석, , 서해문집 “사람은 그의 전체적인 상황, 그가 응답해야 하는 요구의 술어로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가 그 본성으로 무엇을 하느냐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15) 인간-존재는 인간-되어감이다. 인간은 자기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자기 삶을 형성해 나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이다. 같음은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형성된 습관이고, 다름은 일상을 새롭게 경험함으로 빚어지는 현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저자이다. 주어진 시간의 잉크가 다 마르기 전까지 삶의 이야기를 빚어가는 것이 인생의 과제이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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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칼럼] 실적으로 평가되기 어려운 일카테고리 없음 2022. 1. 21. 16:09
실적으로 평가되기 어려운 일 엄벙덤벙 지나다 보니 벌써 1월 중순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새해 결심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자는 생각뿐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떠밀리면서 적잖이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은 늘 새롭게 다가오지만 익숙한 얼굴을 대하듯 무심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우리 버릇이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해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그 시간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문제는 익숙해지는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긴장도 변화도 일어나기 어려운 상태이다. 타성에 빠지는 순간 변화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타성이란 오래 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을 뜻하지만, ‘게으름’ ‘소홀히 함‘ ‘업신여김’이라는 뜻이 그 속에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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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칼럼] 가슴에 기둥을 세워주신 분설교모음 2022. 1. 16. 23:20
가슴에 기둥을 세워주신 분 서울에 처음 올라와 아직 낯설기만 할 때 집안 어른이 내게 골목 어귀에 있는 가게에 가서 담배 한 갑을 사오라 이르셨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곤 하지만 어수룩한 태를 내고 싶지 않았다. 골목길을 걸어가며 몇 번이나 서울말 연습을 한 후 마침내 가게 주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담배 한 갑 주세요.” 하지만 가게 주인의 응답은 나를 좌절시켰다. “너 시골에서 왔구나?” 굳이 그렇게 지적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으나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골학교에서 서울로 전학 올 때 커다란 대포알을 잘라 만든 종을 울려 전교생을 운동장에 불러 모으고는 나의 장도를 축하해주셨던 교장 선생님이 떠오르며 아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부모님은 어쩌자고 눈 뜨면 코까지 베인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