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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_이현주좋은글 2022. 1. 4. 16:15728x90반응형SMALL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
같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때면 생각나는 성서 구절이 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의 한 대목.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 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 오직 우리가 어 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요컨대, 자기에게는 잡고자 하는 바가 있거니와 아직 그것을 잡지는 못했고 다만 그것을 잡으려 달려갈 뿐이라는 얘기다.
그가 과연 그 잡 고자 한 것을 살아생전에 잡았는지 아니면 끝내 잡지 못하고 말았는지, 그것은 내가 알 수 없고 또 알 바도 아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푯대를 향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삶의 자세다. (중략) 지난날의 지난 날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나는 성자(聖者)가 되고 싶었다. 알베 르트 슈바이처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프란체스코를 존경했고 어거스 틴을 감명깊게 읽었다. 지금도 나는 그 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 필코 성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런 것은 이미 내게 문제가 아니 다. ‘성자’라는 타이틀은 세상이 그에게 주는 것이지 본인이 획득하는 게 아니다. 세상이 성자라고 이르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성자가 되기 위해서 살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는 죽는 순간까지 바라보고 달려 갈 목표가 있었을 뿐이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는지, 그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오직 나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 살다 보니 어느덧 예순을 눈앞에 두었다.
잘못 살아온 지난 날이 내겐들 왜 없으랴? 그러나 지난 날은 지난 날이다. 이제 와서 어쩔 것인가? 과거의 잘잘못에 발이 묶여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이왕의 어리석음에 새로운 어리석음을 보태는 격일 따름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그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과거가 내게 아무 의도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건 그렇지 않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미래도 없는 것이다. 강에게 개 울이 없다면 바다가 어찌 있겠는가? 내 과거는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지난날의 잘잘못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여기 어떻게 있겠는가? 나는 내 허물과 실수와 잘못들을 밟고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정직하게 말한다면, 지난날 내가 저지른 숱한 허물과 잘 못들에 대하여 자랑까지는 아니라해도 고맙게 생각한다. 나아가 좌절과 낙담을 거듭 경험하면서도 그것들에 함몰되지 않고 걸어온 자신이 대견스럽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내가 내 발로 여기까지 온 것일까?
행복한 사람
나는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은덕을 입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과연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가? 놀라게 된다. 나를 낳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비롯하여 이모 저모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 내 말을 들어주고 내 글을 읽어 준 이웃들, 날마다 먹을거리를 마련해 준 농부와 어부들, 그런가 하면 자유의 소중함을 몸으로 깨닫도록 도와준 군부 독재자들, 깨끗하지 못한 돈은 개인과 사회를 망칠 뿐이라는 진실을 일깨워 주느라고 지 금도 분주한 정치인들까지, 나는 참으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을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나만의 운명일까? 여기까지 잃어 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운행하고 있듯이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는 내가 저가없는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이듯이 당신도 당신의 바 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임을 믿습니다. 나는 내가 이 땅에서 미완의 생애를 마치게 되듯이 당신 또한 결국은 미완의 생애로 끝날 것임을 믿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든지, 그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과 함께 행복한 사람입니다. 평생 달려가도 끝내 도달하지 못할 곳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현주, <<작은 것이 아름답다>> 12월 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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